별이 달이와 함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본문
한국전쟁은 우리 땅에서 일어난 미국의 전쟁이다. 때문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는 미국에 남아있고, 그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미국인 학자가 좀 더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과 미군정시기의 잔혹함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좀 더 잘 기억하고 싶은 생각에 책을 읽으며 줄을 쳐놓은 부분과 책에 메모를 해둔 것들을 옮겨 적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p96
평양의 터무니없고 끝도 없는 우상화가 어떻든 간에, 김일성은 항일운동에서 흠결 없는 혈통을 지녔다.
p98
김일성은 소련이 선택한 사람은 아니었다.
p107
미국이 일방적으로 내린 1945년의 38도선 분할 결정이 "실제로 발생한 충돌의 초대장"이었다는 것이다.
p129
한국전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다. 왜냐하면 공개적인 조사와 시민 불복종을 불가능하게 했던 매카시즘의 절정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p135
남한이 영토를 회복하고 북진하면서 유사한 잔학 행위들이 한국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이때 용감하고 정직한 저널리즘도 갑자기 사라졌다.
동맹국과 동맹국 군대를 겨냥한 비판은 금지되었다.
p136
검열을 통과한 것도 매카시에 의해 테러를 당한 국내 전선에서 삭제되기 일쑤였다.
p161
1945년 오전 11시 '복스카Bockscar'라는 별명을 가진 B-29폭격기가 나카사키 상공에 나타났다. (1945년 8월 6일 미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p162
다음날 ~ 한국을 어디에서 분할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들은 위도 38도선을 선택했다. ~ 그렇게 하면 권력이 집중된 수도 서울이 미국 점령지구 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 그 결정은 1945년 8월 15일 발포된 맥아더 장군의 일반명령 제1호로 구현되었다.
존 리드 하지 장군이 지휘하는 오키나와의 제24군단은 ~ 9월 8일에 상륙할 수 있었다.
38도선 이남의 한국을 완전히 점령했다.
p163
점령군 사령부는 남한을 거듭 적의 영토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몇몇 곳(특히 남동부 지역)은 적지라고 선언했다. 또한 점령군은 전후 어느 나라 정권도 그토록 분명하게 미국의 간섭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남한 정치에 개입했다.
p164
1942년 중반 국무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 한국이 전후 태평양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고 걱정했고, 일본이 패망한 뒤 한국 전체나 그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계획을 수립했다.
제24군단 정보과장 세실 니스트 대령은 ~ 한국의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을 찾아냈다. 니스트 대령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지만, 그는 그 오점이 빠르게 씻겨나갈 것으로 기대했다.
p167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추방되었다가 입국한 정치인들을 지지했다. 이들은 친일의 오점은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독재 성향이 있는 선동가이다.
그 결과로 미국 점령 지구에서는 극우파가 공공연히 정치 구조를 장악했다.
1940년대 말은 실로 그 이후 한국 정치를 만들어낸 도가니였고, 미국 앞에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책임이 남겨졌다.
p168
나아가 미국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북한의 인민공화국과 다른 독자적인 움직임으로서, 9월 6일 서울에서 선포되었으며 지방에 수많은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1946년 초 한국은 사실상 분단되었고, 1948년에 별개의 한국 국가를 세운 두 명의 지도자(이승만과 김일성)와 그들의 두 정권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정령군 사령관 하지 장군)는 도착한 지 석 달이 지나지 않아 공산당에 "전쟁을 선포했다(여기서 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말한다. 하지는 좌파와 항일저항운동, 인민주의자, 토지개혁 옹호자의 잡다한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오인했다.).
1945년 12월에 장교를 위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5월에 설치된 조선경비사관학교의 전신이었고, 조선경비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었다.
p170
이러한 경과에 맞선 저항은 북쪽보다 남쪽에서 훨씬 강했다. 1946년 10월과 11월에 큰 반란이 일어나 미군 점령을 뿌리채 흔들었다.
p171
이 시기에 남한은 훗날 미국의 제3세계 정책의 특징이 되는 정책 갈등과 반공산주의 정책의 축소판 세계였다.
군정 시기 한국 남서부
p173
일본 패망 후 첫 해에는 미국의 한국 점령이 다른 미래로 이어질 수 있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남서부 지방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후 한국 전역에서 일어난 일들의 축소판이었다.
전라남도는 1890년 초 동학농민전쟁의 싸움터였다. 한국의 부와 한국의 쌀을 남서 지방 항구들을 통해 일본과 세계경제로 내보냈던 일본인 수출업자들이 합류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봉기가 진압된 후 한참 지난 1920년대에도 일본의 여행 안내인은 전라남도의 내륙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도의 수도인 광주는 1929년 일본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 봉기의 장소이자, 1980년 군부 쿠데타 세력에 맞선 항쟁의 중심지였다.
p174
일본 패망 이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들이 설치되었꼬, 이는 곧 '인민위원회'로 바뀌었다. 작고한 전임 대통령 김대중은 당시 목포에서 인민위원회에 가입했다.
인민위원회는 다양한 정치적 면모를 갖춘 애국적이고 반식민주의적인 단체였으나, 서울의 미국인들은 신속히 인민위원회에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씌웠다.
그러나 남서부 지역에서 미국의 민정팀은 현지 인민위원회와 1년 넘게 협력했다.
p175
광주 담당자는 김석으로 일제 때 정치범으로 11년간 복역한 사람이었다.
미국인들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광주에서도 소멸한 일제의 통치 구조를 되살리기를 원했으며, 심지어 전임 도지사 야기 노부오를 12월까지 유임시켰다.
김석은 10월 28일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직접 본 한 미국인에 따르면, 그의 재판은 완전한 조작이었다. ~ 다시 수감된 것이다.
p176
'1946년 전라남도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라는 보고서
봉기는 거의 한 달 전에 대구에서 시작했고 농민전쟁의 고전적인 유형을 따랐다.
이 큰 봉기의 원인은 미군 점령 첫 해에 한국인들이 느낀 심한 좌절감 → memo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줄 알고 기뻐했으나 미군정 치하에 들어간 것을 깨닫고 좌절한 것일까?
봉기는 전적으로 한반도 남단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북한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했다.
p177
이 먼 과거의 사건들은 ~ 미지의 역사적 순간으로 남아 있다. 오직 그 사건들을 목격하거나 실해당한 자들만이 알 것이다.
어떻게 미국인들은 한 나라를 점령한 지 1년 만에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하게 얼굴 없는 '공산주의자'라든지 오합지졸 '폭도'라는 꼬리표를 붙여 총을 쏘아댈 수 있었는가?
삼척의 해방
p178
일게강점기에 일본의 큰 시멘트 회사 오도나는 한국에 많은 공장을 세웠는데, 삼척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부 북한에 있었다.
p179
공장은 10월 1일에 한국인 기술자와 공장노동자로 완전히 재가동되었다.
그들이 노동조합을 원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1945년 12월 미군정은 명령 제33호를 발포하여 모든 공장의 자치위원회를 금지했다. 명령은 또한 이전에 일본인이 소유했던 모든 공공재산과 사유재산, 즉 큰 공장을 전부 포함하여 약 3000개의 재산이 공정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1947년 마침내 미군정은 좌익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p180
1950년대에는 70%가 이른바 우익이었다. 이들도 노동조합은 갖지 못했다.
제주반란
p181
이전에 기밀로 분류되었던 미국 자료는 이 섬 주민들에 대한 잔인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지만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던 미국 자료에 따르면 3~6만명이 살해되고, 최대 4만 명이 일본으로 도피했다(아직도 오사카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살해된 사람의 숫자를 8만 명으로 제시한다. 1940년대 말 제주도 인구는 많아야 30만명이었다.
p182
1948년 초까지 제주도에서 실질적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한 것은 강력한 좌익 인민위원회였다.
본토에서는 공식적으로 지휘부를 세웠으나, 제주도에서는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들은 북한과 의미 있는 유대가 전혀 없었고, 본토의 남로당과도 거의 연계가 없었다. 제주도는 1945~47년 동안 평화롭게 잘 통치되어 본토와는 크게 대비되었다.
1948년 초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이 남한 단독정부로 그의 권력을 안착시키려 하자, 제주도민은 강력한 유격전으로 대응했고, 이는 곧 섬을 찢어놓았다.
하지 장군은 1947년 10월 ~ 제주도는 "인민위원회가 코민테른의 큰 영향 없이 평화롭게 통제하는 진정한 자치 지역"이라고 했다.
미군정 조사단은 ~ "온건한 좌파"라고 추정했다.
그들은 간섭받지 않기를 바랐다.
p183
현직 도지사 유해진은 ~ "극우파"였다. 유해진은 "반대 정당들을 가혹하고 오만하게 다루었다."
1948년 6월에 수행한 공식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해방 후 설치된 것으로서 (...)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했다."
그 분란이 "좌익의 선당"이 아니라 관의 무능력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p184
조사 보고서 작성자는 도자사 유해진의 해임을 요청했지만, 윌리엄 딘 장군은 1948년 말 그를 쫓아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섬 주민들의 화를 부른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서북청년단으로 알려진 우익 테러집단을 풀어 좌익 세력을 억제하고 전향시키려 했던 일일것이다.
한국 서북부 출신의 청년들로 구성된 청년단체
파시스트 청년단으로 묘사되었다. 단원들은 주로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출신
p190
1949년 초가 되면 제주도 마을의 70% 이상이 불에 타서 완전히 사라졌다. 4월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p191
도민 5~6명에 1명꼴로 사망했으며, 전체 마을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여수반란
p194
제주반란이 진행되는 중에 ~ 남동부의 항구 도시 여수에서 반란이 일어나 곧 다른 지역으로 퍼졌는데, 이는 한동안 갓 태어난 공화국의 토대를 위협하는 듯했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1948년 10월 19일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가 제주도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로 출항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여기서도 실제로 반란을 진압한 지휘관들은 미국인이었고
p198
1948년 말 이승만에게 ~ 한국인 공산주의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모두가 주시하고 있소." 약한 정책을 취하면 미국 정부의 지지를 잃을 것이고, 그 위협을 잘 처리하면 "한국은 크게 존중받을 것이오."
p199
1948년 3월 미국인 기자 휴 딘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한국이 곧 그리스나 북부 중국에서 벌어진 것과 비슷한 내전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
우리가 알고 있는 빨치산 유격전은 소련의 지원과 무기를 받은 북한이 외부에서 유도했으며, 이승만 정권이 침투분자들과 싸우는 동안 미국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증거를 보면 소련은 남한의 빨치산에 관여하지 않았고, 북한은 주로 강원도 북동부의 침투 시도나 유격대와 관련이 있고, 겉으로는 관여하지 않은 듯 보이는 미국인들은 남한의 대유격전 부대를 조직하고 장비와 최고의 정보를 제공했으며 작전을 세웠고 때로는 직접 그들을 지휘했다.
p201
남한 반란의 주된 원인은 ~ 토지 관계의 사회적 불평등 및 극소소 부자와 빈민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었다.
결국 남한에서 최대 10만 명의 한국인이 한국전쟁 이전에 정치적 폭력으로 살해되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최소한 10만 명이 더 살해당한다.
p202
1949년 5~12월 경계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지속된 전투는 미국 내부 자료에 의하면 대체로 남한군이 시작한 것이었고
<초토화된 한반도 : 공습의 여파>
p213
그러나 미국인이 잘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미국이 3년 동안 민간인 희생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북한에 융단폭격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공습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소이탄 투하부터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 전쟁 막바지에 북한의 큰 댐들을 파괴한 것까지 다양하다.
p223
1951년 6월 합동참모본부는 전술작전 지역에서 핵무기 사용을 다시 한 번 숙고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전술적 사용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해 수립된 비스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p226
미국 공군의 평가에 따르면 최종적인 도시 파괴의 규모는 독일과 일본에 비해 훨씬 컸다.
미국은 한국에서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3만 2557톤의 네이팜탄은 계산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쟁구역 전체에 투하한 것이 50만 3000톤이었다.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던 반면,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로"추산되었다.
p228
저들은 잔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고한 자들에게 네이팜탄을 퍼부을 권리가 있다.
<학살의 기억>
p235
미국 병사들은 민간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듭 되돌아와 그들이 모두 죽었는지 확인했다.
노근리 사건
p242
memo 1945~1953년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우리는 공산당의 폭력성과 잔인함만을 주입받았는데,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도 그에 못지 않은 학살을 자행했다. 균형잡힌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p244
(대전학살) 목격자들은 미군 장교들이 지프차 두 대를 타고 와서 학살을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로이 애플먼이 쓴 한국전쟁 초기에 대한 미국의 공식 역사는 한국군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대신 북한군이 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서구의 역사책들은 대부분 동일한 이야기를 전한다. 맥스 헤이스팅스는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잔학 행위에만 주목했다(상세히 분류하거나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p246
수원 인근에서 정치범을 체계쩍으로 학살한 사건을 증언했다.
나는 무기력하게 서서 그 사건을 전부 목격했다. 커다란 불도저 두 대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 대는 도랑 형태의 매장지를 팠다. 저주받은 자들을 태운 트럭들이 도착했다. 그들의 손은 이미 등 뒤로 묶여 있었다. 그들은 떠밀려서 새로 판 매장지 끝을 따라 긴 줄로 늘어섰다. 그들은 곧 총에 머리를 맞고 매장지로 밀려 떨어졌다.
이도영이라는 뉴욕의 심리학자가 마침내 기밀에서 해제된 이 특별한 비극의 사진들을 입수했다.
memo 얼마나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는가. 지금으로선 상식적인 올바른 행동도 당시엔 공산당으로 몰릴 수 있는 빌미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나와 주변 사람들의 조상들은 모두 살아남았던 것이다.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는가.
한국 진실화회위원회의 대전 학살 조사는 완결되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내려진 결론은 최소한 4000명이 한국 당국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후 북한이 더 살해해서(수천 명은 아니다) 그들을 같은 구덩이에 묻었다.
p254
memo 김종원.. 또한명의 전두환을 보는 듯하다. 그런 인물들이 우리 역사를 장식하던 시대.
p256
(북한이 저지른 잔학 행위)
공산주의자들은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확신한다고 하자. 그러나 이런 확신도 민주적인 저의 개념의 의리를 줄이지는 못한다.
memo 남한 사람인 나는 전쟁 당시 또는 전후로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함만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혹은 그보다 심하게 남한 군인들도 무자비하게 잔인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분보다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친일분자들이 지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p264
memo 공산주의자에 대한 집단적 증오심. 인간의 한계일까. 인간은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존재인가. 종인가.
p266
memo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매장되었는가. 당시 그것은 얼마나 쉬운 결정이었는가. 인간은 원래 그런 종인가.
p308
한국전쟁은 매카시즘 광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으며,
memo 매카시즘 광풍은 지금까지도 이곳에 남아서 계속해서 불고 있다. 왜? 미군정시기 ~ 한국전쟁 시기. 미국이 남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이제 이 광풍이 죽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뚜렷이 남아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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