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수젠코킨 지음)

진지한 꽃사슴 2015. 3. 27. 11:10

 

 

어느순간부터 꿈을 꽤나 생생히 기억하는 편이다. 도대체 나의 머리 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길래 나는 그런 꿈을 꾸고 있는 것을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최근 뇌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말은 나의 이러한 의문을 풀어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긴다.

 

이 책은 직접적으로 꿈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뇌'와 '기억'에 대해서 연구한 한 과학자의 기록서이다.

그 연구의 중심에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H.M., 헨리 몰레이슨이다.

 

헨리는 어려서부터 간질 증상이 있었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그 증상이 심각해져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10여년의 약물 치료 끝에 담당의는 당시 임상이 진행되지 않았던 실험적인 뇌수술을 권유하였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헨리와 그의 가족은 이 수술에 희망을 걸게 되었다. 1950년대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헨리는 20대였다.

그러나 헨리는 이 수술로 인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했다. 간질은 잦아들었지만 그는 불과 몇십분 전에 있었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당연히 헨리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대신 많은 과학자들을 만나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뇌의 어떤 부위가 어떤 일을 담당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그 많은 과학자들 중에서 수젠코킨은 그와 46년간의 인연을 맺게 되었고, 헨리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약 반세기동안 뇌과학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책은 과학자의 기록을 통해 '뇌'와 '기억'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면서 그 속에서 과연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자아'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내가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을 요약하자면, 뇌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담당하는 영역이 분리되어 있으며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옮겨주는 기관도 있음을 알게 됐다. 모든 단기기억이 장기기억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복 등의 학습(응고화)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 밖에도 친근감을 담당하는 영역, 서술기억(사실과 사건을 의식적으로 인출하는 기능)과 비서술기억(기술과 습관 같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습하는 기능)의 영역, 일화지식(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기억)과 의미지식(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으며 헨리는 이 중 일부를 잃게 된 것이다.

 

뇌는 나의 말과 행동,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혹자는 나의 뇌가 곧 나의 자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기억력'은 나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일관된 자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억상실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자아'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면 일관되게 기억을 못하는 상태와 기억력과 상관없는 '성품'으로도 그 사람을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